[오마이뉴스 데니스 하트 기자]
|
▲ 2008년 수업중인 동양학 연수 참가자들. |
ⓒ 데니스 하트 |
| |
안녕하십니까? 아름답고 청명한 초여름입니다만 세상은 어지럽습니다. 한국에서 연일 벌어지고 있는 중고등학생들의 촛불시위를 관심있게 지켜보면서, 재치와 지혜가 넘치는 용감한 학생들에게 지지와 응원을 보냅니다. 촛불시위에 나선 시민들과 어린 학생들은 한국 사회의 희망일 뿐 아니라 전 지구적 거대자본의 횡포와 탐욕이라는 어둠에 맞서는 소중한 등불입니다.
촛불은 반미라든지, 미국 사람들이 먹는 쇠고기이니 안전하다든지, 심지어 미국을 믿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까지 주장하며 식민지적 노예근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정부 관료들이나 친미-친자본 재벌 언론들을 보면 약 1세기 전 을사늑약에 가담했던 매국노들이 연상됩니다.
미국에서 온 것이라면 아무것이나 신봉하고 사랑하는 한국 수구계층의 일편단심은 제 주변의 보통 미국 사람들이 광우병 위험이 있는 쇠고기 수입 위기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에 대해 철저히 무관심하고 무식한 것에 비추어보면 더욱 딱해 보입니다.
대견한 한국 중고등학생들, 한심하다 못해 딱한 한국 관료들
서론이 좀 길어졌습니다. 오늘은 프리만 재단의 지원으로 미국의 전 지역에서 올해로 10년째 시행되고 있는, 현직 중고등학교 교사를 대상으로 하는 동양학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느낀 점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NCTA라고 흔히 줄여 부르는 이 프로그램의 정식 명칭은 '전국 동양학 교육 협의회(National Consortium for Teaching about Asia)'입니다.)
저는 이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작년과 올해 봄 학기에 오하이오 동북 지역의 교사들을 대상으로 세미나를 실시했습니다. 전에 일반 미국인들이 한국이 어디쯤 있는지도 모를 만큼 한국에 대해 무지하다고 쓴 적이 있는데
, 청소년 교육을 담당하는 지식인층인 교사들도 거의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교사들을 보면 왜 이렇게 일반 미국인들이 아는 것이 없는지 이해가 갑니다.
이 세미나에 참여하는 교사들은 대체로 자기 계발과 수업 내용의 향상에 관심이 많은 열성적인 교사들이기는 하지만, 동북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는 전혀 지식이 없는 분들과 중국이나 일본에 관심이 있거나 다녀온 적이 있어 전문지식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분들, 이렇게 두 부류가 있습니다.
전자보다 후자가 가르치기가 쉬울 것 같지만 뜻밖에도 후자에 속하는 참가자들이 세미나에 준비 없이 참여하고 강의 내용에 적응을 잘 못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동북아에 대한 '지식'이란 것이 동양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에 머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인데 이런 경우, 그들의 그릇된 시각을 바로잡고 나름대로 전문가라는 약간의 자만을 넘어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간에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에 대한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은 교사들이나 제가 가르치는 대학생들이나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중국은 유럽인들이 발견하기 전에는 세계와 단절되어 있었다."
"서구가 중국을 '개화'하려 했지만 유교사상에 절어 있어서 근대화가 불가능했다."
"중국은 수천년 동안 같은 민족·영토·문화를 유지하며 거의 변화가 없었다."
"일본은 항상 한국에 앞섰고 일본과 한국은 언제나 우방국이었다."
"일본은 문화적으로 앞서갔기 때문에 먼저 근대화했다."
"중국·일본·한국은 문화적으로 엇비슷하고 봉건적이며, 여성들은 모두 순종적이고 지위가 낮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은자의 왕국이었다."
"북한의 지도자는 미친 사람이고 북한은 위험한 나라이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남한을 구해주었다."
서구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국 동양학 교사들
이러한 선입견은 단순히 잘못된 단편적인 상식이 아니라 서구 중심적이고 미국 예외주의적인 뿌리 깊은 시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10주간의 교육으로는 바로잡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전족의 풍습을 중국의 후진성이나 봉건성의 증거로 보기보다는 어느 사회에서나 나타나는 가부장적 억압의 한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서양 여성들의 하이힐로 인한 발의 기형이나 빅토리아 시대에 12인치 허리를 만들기 위해 내장기관이 망가질 정도로 꽉 조이는 코르셋을 입었던 것도 이와 본질적으로 다르지는 않다고 해도 꼭 전족 풍습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교사들이 있습니다.
북한의 주체사상이나 핵무기가 미국인의 안전을 위협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북한으로서는 미국의 위협에 대응하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한 수단이라고 설명해도 북한을 비이성적이고 호전적인 전체주의 국가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교사들도 있습니다.
|
▲ 2007년 수업중인 동양학 연수 참가자들. |
ⓒ 데니스 하트 |
| |
일본에 대해 특별히 관심이 있는 교사들뿐만 아니라 일반 미국인들은 일본을 동양의 대표로 생각하거나 일본 중심적인 시각으로 동양 특히 동북아를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고 복잡하지만, 냉전 시대가 시작된 후 약 50년 간 일본의 여러 정부기관과 대학교들이 아주 영리한 대미 정책을 실행한 것이 한 가지 중요한 이유입니다.
일본의 대외정책 전문가들은 미국과 장기적으로 유리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미국인들이 일본을 좋아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수백만 달러를 들여서 미국 대학에 일본학과를 창설하고, JET 프로그램(The Japan Exchange and Teaching Program) 등 수많은 프로그램을 통해 해마다 학생들과 교수들이 일본에 와서 일본어와 일본 역사·문화·미술·음악 등을 배우게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일본에 우호적이고 일본을 아시아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미국 학생들과 학자들을 여러 세대에 걸쳐 양산하게 된 것입니다.
거기다가 냉전 기간 동안 중국과 북한 등 공산주의 국가들을 적대시하여 학문적 교류조차 금지한 동시에 일본을 '맹방'이자 주요 무역 상대국으로 대우한 미국 정부의 정책도 미국인의 동북아 인식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군과 싸웠지만, 저는 <우주소년 아톰> 만화영화를 보며 일본은 우리의 친구라고 생각하며 자랐습니다.
외면당하는 한국학... 자료도, 가르칠 사람도 부족
|
▲ 외국인을 위한 한국 역사 교과서. |
ⓒ 한국학 중앙연구원 |
| |
동양학 교사 연수 프로그램을 재정 지원하는 프리만 재단은 남북한과 중국·일본에 세미나 시간을 각각 3분의 1씩 할당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중국학과 일본학을 가르칠 수 있는 교수들의 숫자에 비해 한국학 교수들의 숫자는 턱없이 부족하고 세미나 담당 교수들의 한국학 배경 지식이 거의 전무합니다.
그렇다 보니 실제로 많은 경우 한국학 부분은 최소화하거나 아예 생략하고 중국과 일본에 관한 내용으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서구편향적인 미국의 중고등학교 교육을 보완하고 조금이나마 동양에 대해 가르칠 수 있는 귀한 기회인데 그조차도 한국이 외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어로 돼 있는 한국학 기본도서가 모자라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대학교 고학년이나 대학원 과정에서 교과서로 쓸 만한 책은 더러 있지만 비전공자가 보기에는 딱딱하고 어려우며 사진·그림·지도 같은 시각 자료가 많이 부족합니다.
다행히 한국학 중앙연구소에서 발간한, 한국사를 종합적으로 쉽게 볼 수 있는 외국인을 위한 교과서가 최근에 나왔습니다. 고등학생들도 읽을 수 있는 수준이어서 영어로 된 기본 한국학 책을 찾는 분들에게 권할 만합니다. 또 최근에 동북아 역사재단에서 발행한 독도와 동해 관련 영문 소책자들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리 세미나에서는 한국·중국·일본 역사가 어떻게 상호 연관되어 있는지를 많이 강조했습니다. 백제가 일본의 고대 문명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설명했고, 임진왜란과 거북선과 명량대첩, 근대사에서 일본의 한국 강점과 식민지 수탈에 대해 상세히 다루었습니다.
일본과 한국을 막연히 비슷한 이웃 나라들로만 생각했던 미국인 교사들은 일본의 식민 폭정이나 한국인들의 끊임없는 항일 투쟁에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한국전쟁 참상과 미국 책임에 놀라는 교사들
최근 한국 내에서도 알려서 크게 논란이 되었던 요코 왓킨스의 <요코 이야기>(영어 제목은 'So far from the bamboo groves')는 실제로 미국 각급 학교에서 많이 읽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부 NCTA 강사들조차 매년 세미나 부교재로 채택하고 있어서 기회있을 때마다 문제제기를 해왔습니다.
처음에는 "같은 사건이라도 보는 시각은 다르지 않은가? 문학작품이 반드시 역사적 사실과 일치해야 하는가?"라고 제게 의문을 제기하던 강사들과 교사들도 해방 당시 일본인들이 거의 전부 무사히 한국을 떠났다는 한·일 양쪽 시민들의 증언과 일제 731부대의 만행, 그리고 2차 세계대전 후 미국 정부와 일본 전범이 거래한 사실을 제시하면 <요코 이야기>를 교과서로 쓰면 안 되겠다고 수긍하곤 했습니다.
교사들에게 최숙렬 선생님의 <떠나보낼 수 없는 세월('Year of Impossible Goodbyes')>을 대신 추천했는데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 문학이 영어로 많이 번역되어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닙니다마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읽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것이 많아서 앞으로 청소년 문학의 번역도 많이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무엇보다 한국전쟁에 대한 강의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대부분 교사들이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한국전쟁밖에 없었는데 그조차도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려 1400여 년 동안 통합된 민족 국가를 유지해왔던 한국을 미국이 분단했으며 한국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사실에 매우 놀라는 교사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의 참상을 알고 나서는 미국은 무조건 선하고 옳다고 믿었던 데 대해 처음으로 깊이 회의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우선 한국전쟁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강의한 후 전쟁의 여러 장면들을 찍은 사진 30여장을 슬라이드로 보여주었습니다. 영화에서 보던 원거리에서 찍은 폭격 장면이나 용감한 미군들이 불쌍한 한국 고아들을 구출해내는 장면에 익숙한 교사들이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실제로 미군의 의도적인 무차별 폭격으로 민간인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난민이 되고, 수없이 폭격당해 죽거나 팔다리가 절단되어 쓰러지고, 여성들과 아이들이 네이팜탄에 불타 죽고, 초등학교 건물이 공중 폭격으로 무너진 장면을 보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충격이었습니다.
|
▲ 올해 봄에 다시 모여 연수 동창회를 하는 2007년 참가자들. |
ⓒ 데니스 하트 |
| |
달라진 교사들... 한국 문화 독자성, 한글 우수성 등 가르쳐
연수를 마친 후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교사들이 한국과 북한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고 이야기할 때, 그리고 흥미로운 교과 학습안을 제출할 때입니다.
한국·중국·일본 문화가 거의 비슷하거나 모두 중국에서 유래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에 독특한 언어·음식·의복·주거 문화가 있다는 것, 한국 여성들은 서양 문화의 영향을 받기 전에는 그저 노예처럼 억눌려 살아오기만 한 줄 알았는데 대장금과 황진이와 유관순과 윤희순(여성 의병장)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든지, 장보고와 오랜 국제 무역의 역사를 통해 '한국은 세계 문명과 유리되어 은둔자처럼 살아온 나라'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말씀에 적어도 한국에 대한 바람직한 지적 호기심의 시작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글은 세계에서 유일한 '발명된' 문자이며 사용자를 위한 '매뉴얼'이 창제 당시 발간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제라는 것을 미국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킹 선생님, 한국과 미국의 식사 예절을 비교해서 가르친다는 패리시 선생님, 한국전쟁에 관한 여러 글을 읽고 나서 학생들에게 각기 한국·북한·중국·미국인들의 역할을 맡아 역사극을 하게 하는 헤트릭 선생님, 3·1운동과 1919년의 전 세계적 민족주의 운동의 연관성을 가르치는 벨 선생님, 한국근대사 수업과 병행하여 최숙렬 선생님의 책을 읽고 역사적 사건과 개인적 체험을 연결하게 한다는 로저 선생님의 학습안은 매년 수십 명의 어린 학생들에게 한국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북돋울 것입니다.
동양학 연수 과정을 마친 교사들의 학습계획안(Lesson Plans)을 보고 싶은 분들은 '덧붙이는 말'에 있는 웹사이트를 찾아보시고 한국 관련 학습안에 대한 제안이나 질문이 있으면 각 사이트 담당자나 제게 이메일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