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c/잡동사니

[스크랩] 100년전 서양에 비친 한국인의 모습...

침미다래 2007. 9. 17. 16:42
우연히 역사과목 공부를 하다가 영국의 지리학자이던 비숍여사의 한민족에 대한 좋게 평가한 글을 보고 과거 100년전 전통이 있던 시절의 한국은 서양에 어떻게 비쳐줬는가 조사하다가 찾은 내용입니다.

-------------------------------------------------------------------------------------

지난 100년을 돌이켜 볼 때 한국인이 겪어 온 역사는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40년에 가까운 식민 지배 끝에 찾아온 해방은 분단으로 귀결되었고, 동족 상잔의 전쟁을 겪어야 했고, 남쪽과 북쪽 두 쪽 모두 가혹한 독재가 계속되었고, 근래에는 북의 식량난, 남의 IMF 관리 체제..... 어떻게 보면 한국인은 생존하는 데 지난 1세기를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제부턴가 세계화의 구호가 요란하다. 21세기를 눈 앞에 두고 뉴 밀레니엄의 장미빛 풍선도 높이 떠올랐다. 이제 시대는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 어떻게 세계사에 기여할 것인가를 묻고 있다.
“한국인,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글에서는 외국인, 특히 서양인의 눈에 반영된 한국과 한국인의 모습을 정리할 것이다. 개항 후 선교사의 자격으로, 아니면 외교관이나 탐험가의 신분으로 한국을 찾았던 서양인들은 우리가 너무도 익숙해 잘 알지 못하는 우리 민족의 특성을 잘 지적해 주고 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옛날 한국인의 모습이 비록 초라하고 볼품 없다 하더라도 바로 그들이 이 역사를 이만큼 이끌어 왔다. 그리고 100년도 더 지난 오늘날의 우리가 지금 다시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1) 한국인은 잘 생기고 건장한 민족이다.
서양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대체로 한국인의 외형적 특징은 일단 건장하고 잘 생겼다. 키의 크기나 체력에 있어서 일본인보다 훨씬 우월하고, 중국인과 비슷하거나 우월하다. 우리 민족의 체질적 조건이 아시아 여러 인종 중 단연 돋보였다는 것은 여러 기록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서양인들은 왜 이러한 신체 조건을 가진 (게다가 뛰어난 지적 능력까지 갖춘) 민족의 나라가 점차 쇠약해지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는가에 대해 궁금해한다. 약간 과장을 했겠지만 마크 트롤로프는 우리나라 사람이 일본인에 비해 “머리 하나 만큼” 더 크다고 하였다. ‘머리 하나’가 대략 20㎝라고 한다면 한국인이 일본인들보다 키가 얼마나 컸는지 알 만하다.
특히 영국 왕립 지리학회 회원이었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의 기록은 굉장히 꼼꼼하고 섬세한데, 조선을 여행하면서 사람들의 키를 일일이 조사해서 한국인의 평균 신장을 기록했다. 그녀에 따르면 100년 전쯤 남자의 평균 신장은 163.4센티미터이고, 여자는 잴 수가 없어 그냥 “땅딸만하고 펑퍼짐하다”라고 썼다. (참고로 1997년 대한민국 남자 평균 신장은 171.3 ㎝였고, 여자는 160.2 ㎝였다.) 새비지의 경우는 한국인을 잘 생긴 민족이라고 규정하면서 얼굴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최근 『맥시멈 코리아』라는 책을 낸 스콧 버거슨은 한국 여자들이 단지 아름다운 데 그치지 않고 화장을 통해 빈틈없이 완벽해지기 위해 노력한다고 하였다.

한국인은 일본사람들보다는 머리 하나 만큼은 크며 건강하고 잘 생겼다.
( 마크 트롤로프, ?The Church in Corea?, 1915 )

정확하고 빠른 운동에서는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강한 자립심과 자유로운 동작을 보이고 있고, 크기와 강한 점에서 중국인과 비슷하고 일본인보다는 우월하다.
( Ernst Oppert, 「조선기행 Reisen nach Korea」)

한국인은 참신한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중국인과도 일본인과도 닮지 않은 반면에, 그 두 민족보다 훨씬 잘 생겼다. 한국인의 체격은 일본인보다 훨씬 좋다.... 한국인들의 일상적 표현은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할 정도로 활기차다. 얼굴 생김새는 가장 잘 생긴 사람들을 기준으로 보아 힘이나 의지의 강인함보다는 날카로운 지성을 나타낸다. 한국인들은 확실히 잘 생긴 종족이다. 체격도 좋은 편이다. 성인 남자의 평균 신장은 163.4센티미터이다. 여자의 평균 신장은 확인할 수 없는데, 세상에서 제일 보기 흉한 옷 때문에 그 결점이 과장되는 여자들의 모습은 땅딸만하고 펑퍼짐하다. 남자들은 힘이 매우 세어서 짐꾼들에게 45킬로그램의 짐은 보통이다. ( 이사벨라 버드 비숍,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

나는 주저하지 않고 한국인이 극동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고 단정하였다. 키가 크고 강인하고, 힘이 세며, 항상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뛰어난 운동 선수를 배출시키고 있다. 내가 한국에 있을 때 손기정이라는 한국 젊은이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국인 중에는 아주 잘 생기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사람이 수두룩하다. 한국인은 영화배우로서 일본과 중국 양국에서 모두 수요가 높다...... 지금 헐리우드에 있는 한국인 배우 필립 안 (안창호의 아들)의 얼굴이 더욱 전형적이다. 중국 제일의 인기 영화배우 김찬도 한국인이다. 한국 여인 중에는 우아하고 천사 같은 마음씨를 가진 선녀같이 아름다운 아가씨가 수두룩하다.
이렇게 비교적 아름답고, 총명하며, 우수해 보이는 민족이 외형상 확실히 두드러진 점이 없는 조그마한 일본인에게 복종하고 있다는 것이 생물학적으로는 걸맞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안짱다리의 짤달막한 일본인 간부가 칼을 거드럭거리며 여러 명의 한국인들에게 거만하게 명령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동행한 선교사에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아마도 열등감이 도리어 뛰어난 성취 능력의 원인이 될 수도 있지 않겠어요.”하고 그녀는 대답하였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바보임이 틀림없어요.”하고 나는 말했다.
“아니예요, 그네들은 일본인보다 훨씬 더 총명하지요. 일본인은 이제 겨우 근대적인 군비에서 선두를 달리게 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 나와 있는 선교사들은 진정으로 한국인들을 사랑하며 그들을 찬양했다.
( Nym Wales, [ Song Of Ariran] )

전체적으로 볼 때 한국인은 잘 생긴 민족이다. 한국인의 얼굴은 타원형이고 정면에서 볼 때는 대체로 길지만, 옆 모습은 약간 오목하다. 코가 양미간에서 약간 평평하고 콧구멍이 넓기 때문이다. ( A 헨리 새비지 ?Corea or chosen? )

한국은 슈퍼모델의 나라다. 서양에서 체코 여인들이 가장 아름답다면, 아시아에서는 누구나 알다시피 한국 여인들이 그 영광을 차지한다. 그런데 한국 여인들은 단지 ‘아름다운’ 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완전히 빈틈없이 완벽해지고 싶어한다. 어찌되었건 외지 사람들은 한국 여자들이 그들의 얼굴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하건 미주알 고주알 따질 권리는 없다. 그건 매우 페미니스트적이지 않다. 화장의 그들의 즐거움이라면, 그들이 그것을 즐기게 내버려두어야 한다. 스콧 버거슨, 『맥시멈 코리아』, 1999 )

우리 민족의 외형적 특징에 대해서는 이들보다 훨씬 오래 전의 기록인 중국 정사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도 실려있다. 그 내용은 진한(辰韓) 사람들이 “어린 아이가 출생하면 곧 돌로 그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들려 하기 때문에 지금 진한 사람의 머리는 모두 납작하다”는 것이다. 또한 [진사(晉史) 동이열전]의 진한(辰韓)조에도 “아이가 처음 태어나면 곧 돌로 그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한다”는 기록이 있다. 고대 중국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던 진한의 ‘납작머리’는 그 뒤에도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외형을 구성하는 한 요소가 되었던 모양이다.
고려에 사신으로 다녀갔던 송나라 서긍은 일종의 사행보고서인『고려도경』에서 이 ‘납작머리’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서긍은 그 납작머리가 옛날 진서(晉書)라는 책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돌로 눌러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타고나는 것이라는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 인물과 의복은 비록 대략은 중국과 같지마는 고려인은 대개 머리에 침골(枕骨:머리뒷부분에 튀어나온 뼈)이 없으나 중이 되어 머리를 깎아 버리면 침골 없는 것이 보이는데 퍽 놀랍고 이상하다. 옛날 ?진사(晉史)?에는, 삼한(三韓) 사람들은 갓난아이를 곧 돌로 그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만든다고 하였으나 옳지 않다. 대체로 종류와 타고난 기품에 따라 그렇게 (납작하게) 되는 것이지 반드시 돌 때문에 납적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
( 송나라 서긍 ?고려도경? )


확언하건대 아시아 여러 민족 중에서 한국인은 가장 잘생기고 신체 조건이 좋은 민족이다. 인종주의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이 사실은 우리가 크게 자랑해도 좋을 듯하다.


(2) 춤추고 노래할 운명을 타고난 민족








< 광주 신창동에서 1997년 출토된 현악기 복원도 >

신창동 유적의 이 현악기는 국내에서 발굴된 가장 오래된 악기로 고대 삼한 사람들은 이런 악기에 맞추어 춤추고 노래도 불렀을 것이다.





아주 오랜 옛날 가무(歌舞)를 관장하는 신이 연연세세 춤추고 노래할 운명을 맡긴 사람들을 찾다가 한반도에서 그 주인공들을 찾았다. 그 신은 어떠한 난관과 시련이 있더라도 이 민족에게 춤과 노래가 끊기지 않기를, 그리고 언젠가 춤과 노래로 이 세상 전체를 구제하도록 계시를 내렸고 사람들은 그 후 춤과 노래 속에서 살고 또 죽었다. 아마 이런 신화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신비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우리 민족의 가무에 대한 유별난 집착은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인에게 있어서 춤과 노래는 그야말로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이미 이천년 전 우리 나라 풍속을 기록한 『삼국지』에는 가무에 대한 기록들이 놀랄 정도로 빈번하게 나온다. 아마 당시 중국인들에겐 이런 풍속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그 당시 우리의 조상들이 왜 춤과 노래를 좋아하고 즐겼는가에 대한 정확한 답을 이끌어내기는 어렵지만 시베리아가 본 고장인 샤머니즘의 신인융합 수단이 노래와 춤인데, 당시 한반도가 그 문화권에 속한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즉 신과 융합하기 위한 수단으로 춤과 노래를 즐겼다는 이야기다. 이 설명이 맞다면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춤과 노래는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종교적인 의미까지도 지니는 것이다. 즉 춤과 노래는 하나의 종교 행위인 것이다.

정월에 지내는 제천행사는 국중 대회로 날마다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데, 그 이름을 영고라 하였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 )

고구려 백성들은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나라 안의 촌락마다 밤이 되면 남녀가 떼지어 모여서 서로 노래하며 유희를 즐긴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조 )

마한은 해마다 5월이면 씨뿌리기를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떼를 지어 모여서 노래와 춤을 즐기며 술 마시고 노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의 춤은 수 십 명이 모두 일어나서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치켜들었다 하면서 손과 발로 서로 장단을 맞춘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마한조 )

변한의 풍습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마시기를 좋아한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한조 )

가무를 즐기는 이러한 풍속은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에 왔어도 계속되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상층의 유교 윤리가 가무를 악덕시한 바람에 다소 움츠려들기는 했지만, 가무를 열렬히 애호하는 이러한 전통을 막지는 못했다. 구한 말 우리나라를 찾았던 서양인의 눈에는 여전히 한국인은 춤과 노래에 천품을 타고난 민족이었던 것이다.

마을마다 북과 나팔, 피리, 몇 개의 솥 뚜껑이 있어서, 흔히 여름철의 고달픈 노동 시간 중에 한참 동안 일손을 멈추고 힘껏 합주하여 피로를 푼다.....
( 프랑스 신부 달레(C.C. Dallet)의 <조선교회사 서설> 중 )

한국인은 일반적으로 모나지 않고 상냥하며 남에게 순종을 잘하는 성품을 갖고 있다. 그들은 중국어를 이해하며 학문을 좋아하고 음악과 춤에 천품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고운 마음씨는 예나 다름이 없어 다른 민족의 모범이 되기에 넉넉하다.
( 프랑스 선교사이며 지리학자인 뒤 알드(Du Halde)의 글 )

아시아 민족 중에서 조선인보다 더 음악에 대하여 열렬한 애호심을 가진 민족은 없을 것이다. 군부의 어느 대신이 손풍금의 연주에 감동하여 평소의 엄숙한 태도를 던져버리고 박자에 맞추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 오페르트 )

이러한 풍속은 근현대사의 격랑을 거치면서도 약화되기는커녕 더 강화되었으며, 이런 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이 바로 가라오케와 노래방의 보급이었다. 먼저 길을 닦아 놓은 것이 가라오케였다. 외래문화가 들어와 가장 빠른 기간 산촌 외딴 마을까지 침투한 문화가 일본의 가라오케였다.
그리고 노래방이 그 뒤를 이었다. 한국에서처럼 노래방이 번창한 나라는 이 세계에 없다. 1998년 기준으로 노래방의 수는 2만 7천 1백 62개이다. 꺽일 줄 모르는 노래방의 기세! 왜 노래방은 한국에서 번성하는가? 한국인들이 단순히 노래부르기를 좋아해서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가?
다시 근본적인 문제로 들어가서 한국인은 왜 그렇게 변함없이 열렬히 춤과 노래를 즐기는가? 고대의 경우에는 종교적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해석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현재의 이 상황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인지.... 한국인은 행복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인가? 아니면 슬프기 때문인가?
밝고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한국인에게 고유한 신명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발산할 수 없는 신명나는 에너지를 노래와 춤으로 분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은 우리 전통사회가 드물게 보는 억압적인 사회였기에 물리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압력을 정서적으로 발산시키는 수법으로 노래가 이용됐다는 이론을 든다. 한이나 원을 스스로 풀어야 하는 성격 때문에 우리 민족은 노래 중에서도 독창이 발달했고 그 때문에 밀폐된 공간에서 혼자 미친 듯이 악을 쓸 수 있는 노래방이 폭발적 인기를 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한국인은 행복할 때나, 슬플 때나 똑같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다. 한국인 그리고 춤과 노래! 정말 알 수 없는 관계이다.

...... 한국은 기대 이상이었다. 한국에 있게 된 것이 만족스러운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은 내가 가본 나라 중에서 가장 노래를 많이 부르는 나라’라는 것이다. 나는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 러시아 뉴질랜드 일본 태국 베트남 영국 아일랜드 등 여러 나라에서 살았고 여행도 해보았다. 그러나 어떤 나라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이처럼 노래를 잘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한국인들은 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노래를 부를 자세가 되어있다. 혼자서도 부르고 여럿이 같이 부르기도 한다. 라디오를 따라 흥얼거릴 때도 있고 텔레비젼 가요 프로그램을 보면서 같이 부를 때도 있고, 길을 걷거나 차를 운전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5년 동안 근무한 일본에서도 동료들이나 친구들과 함께 자주 가라오케에 가곤 했다. 몇몇 대회에 나가 상을 탄 적도 있고 텔레비젼에 출연한 일도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뭔가 한 가지 빠진 것이 있다. 일본인들은 한국인과 같은 ‘노래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노래하기 위해 사는 것 같은데 일본 사람들은 그렇지는 않다...... 정말 한국인은 어디서나 노래를 부른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박찬호 선수가 공을 던질 때도 노래를 할까? 잠실 야구장에 가서도 관중들이 응원하는 광경에 감동받았다. 야구장에서 관중들이 얼마나 노래를 많이 부르는지, 도대체 이 사람들이 노래하러 온 것인지 야구를 보러온 것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들은 노래 중 가장 놀라운 것은 일요일 명동성당 미사에 갔을 때 들은 합창이다. 미국의 성당에서 다 같이 노래하는 것은 대개 억지로 하는 일 같은 것으로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 하는 일 같지만, 한국 카톨릭 신자들이 노래하는 것은 진짜로 노래하는 것이다. 내가 그 자리에서 느낀 것은 그들이 정말로 그곳에 있고 싶어하고 행복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의미일까. 한국인들은 행복하기 때문에 노래를 부르는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누군가 이 의문을 풀어주었으면 좋겠다.
( 주한 美 공보원 공보관 패트릭 리네핸, 주간조선 97. 8. 7 일자 )

...... 한국인들은 에너지가 철철 넘치는 사람들입니다. 어머니가 싱가포르 사람인 저는 말레이지아부터 일본까지 웬 만한 아시아 국가는 다 돌아봤는데 한국인만큼 춤과 노래를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들은 없는 것 같아요...... 상대방을 똑바로 보며 춤추는 서구인들과 달리 한국인들은 눈동자를 상대와 전혀 무관한 곳에 두고도 흥겹게 집단무를 추는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 같아요...... 서구 디스코텍에선 하룻밤 같은 노래가 두 번 이상 나오는 법이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이 항의하기 때문이죠. 좋은 신곡도 많은데 같은 노래에 여러 번 몸을 흔들어야 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한국 디스코텍 문화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같은 히트곡이 하룻밤 여러 번 반복된다는 점입니다. ‘그녀는 예뻤다’ 같은 노래가 하룻밤 열 번쯤 반복돼도 전혀 짜증내지 않고 춤추는 것이 한국 사람들의 독특한 특징이지요.
( 한국에서 9년째 활동하고 있는 미국 출신 DJ 프레드릭 다드웰, 중앙일보 97. 9. 6일자 )

한국에서 이렇게 노래방을 비롯해 수 많은 방이 성황을 이루는 게 나 같은 외국인에게는 신기하겠지만, 한국인에게는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기본적으로 세 영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공적 생활?가정 생활, 그리고 내가 여기서 애써 설명하고 있는 (노래방을 비롯한) 각종 방이 바로 그것이다. 앞의 두 영역은 개인의 자유를 상당히 통제하고 제한하는 도덕적 영역이다. 반면 방은 그런 제한과 제약?도덕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울 수 있는 영역이다. 직장?길거리?상점?식당 등의 공적 영역에서 사회는 그 준엄하고 주의 깊은 시선을 한시라도 돌리는 적이 없다. 가정도 마찬가지로 도덕률이 지배하는 엄격한 공간으로, 질서?안정?성공을 무엇보다 중시한다. 공적이지도 사적이지도 않은 공간인 방은 그 두 지점 사이 어디엔가 존재한다. 바로 방은 사람들이 사회와 가정의 눈초리로부터 벗어나 편히 쉬고 즐기기 위해 찾는 공간인 것이다. 굳이 방말고 보통 한국인에게 다른 유일한 분출구를 찾는다면 기껏해야 야외 정도일까?
( 스콧 버거슨, 『맥시멈 코리아』, 1999 )

한국 사람처럼 노래하기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술 한잔하고 기분 좋아지면 너나없이 노래방으로 직행하는 문화를 보면 말이다..... 나는 한국 손님을 받지 않는 가라오케의 마담을 불러서 한국 손님을 받지 않는 이유를 물었더니 대답이 이랬다. “한국 사람을 받기 시작하면 일본 사람에게는 노래 부를 기회조차 오지 않아요. 마이크 한번 쥐면 절대 안 내주고 혼자서 다하려고 들거든요. 우리로서는 일본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고객인데, 노래를 부를 수 없는 가라오케에 당신들이 찾아오겠어요?” 일리 있는 말이었다. 나도 한국 친구들을 따라 일반 가라오케나 단란주점 같은 데를 더러 다녀 보았는데, 가만히 보니까 손님들끼리 시비가 붙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마이크를 한번 잡으면 도무지 놓을 줄 모르니 다른 손님들이 참지 못해 한마디 하면 그게 빌미가 되어 싸움으로까지 번지는 것이다. 어쩌면 한국에서 유난히 룸 살롱이 발달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일본에도 룸 살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 탁 트인 공간에 서로 모르는 여러 팀이 함께 앉아 술을 마셔도 시비가 붙는 일이 거의 없다. 노래를 할 때에도 자기 차례가 끝나면 미련 없이 다음 사람에게 마이크를 넘겨 준다. 한국 사람들은 같은 일행끼리는 아주 유대감이 강하고 단결도 잘 된다. 하지만 그런 일행이 여럿 모이면, 거기다 술까지 한잔씩 들어가면 십중 팔구 시비가 생긴다. 왜 차례도 안 지키고 혼자만 노래하느냐고 싸우고, 노래도 못하면서 시끄럽게 소리만 지른다고 싸우고, 기분 나쁘게 쳐다봤다면서 또 싸운다. 그러니 아예 따로 따로 방을 만들어서 같은 일행끼리 콩을 쑤던 메주를 쑤던 알아서 하라는 생각에 룸 살롱이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왜 한국 노래가 일본 노래보다 짧은가 하는 점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이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다. 한국에는 정서를 담은 표현이 풍부하지 않은 대신 ‘욕’ 하나만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만한 수준에 올라있다...... 노래가 짧고 욕이 유난히 발달한 이유는 역사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과거 한국 사람들은 먹고 살기 빠듯한 가난 속에서 수없는 외세의 침략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살다 보니 노래말이 짧아졌고 감정을 승화시키는 여유를 찾기 힘들었던 것이 아닐까. 또한 일상적인 언어 생활에서 남한테 미안해 하거나 고마워하는 표현보다는 비난하고 저주하는 표현이 더 많은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한국은 더 이상 가난에 찌든 빈국이 아니며, 언제 외세의 침략을 받게 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약소국도 아니다. 나는 그 증거를 한국에서 정명훈같은 세계적인 예술가가 태어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예술이란 무릇 생존 문제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그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 이케하라 마모루,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 1997 )

한국인의 춤과 노래에 대한 집착은 이제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춤과 노래는 한국인에게 단순한 문화가 아니라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생존의 조건이다. 춤과 노래를 포기하는 순간 그는 한국인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노래를 못 부르는 사람 (음치)은 장애인 취급을 받는다. 요즘 젊은이들은 조금 바뀌어서 음치는 용서할 수 있어도 몸치 (춤을 못추는 사람)는 용서할 수 없다고 한다. 노래보다는 무게 중심이 춤으로 옮겨갈 것같은 느낌이 든다. DDR의 열기는 이것을 반영하는 것이고...... 한국인에게 춤과 노래는 생명이다. 사람들은 생명을 걸어놓고 노래를 부른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다들 일어나서 춤추는 나라는 한국 이외에는 없다. ‘관광버스 춤’이라는 것도 세계에서 처음으로 개발되었다.

언젠가 가만히 서 있는 관광 버스가 들썩들썩 움직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래서 자세히 들여다 보니 버스 안에 있는 승객들이 모두 일어나서 춤을 추는 바람에 버스가 들썩거린 것이었다. 다들 알겠지만 버스에는 좌석 벨트가 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옛날에 고속버스를 타면 안내양이 있어서 꼬박 꼬박 안전 벨트를 매라고 방송했다. 좌석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불의의 사고가 생기면 위험하니까 밸트를 매라는 이야기다. 실정이 이런데도 달리는 버스 안에서 승객들이 모두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다니...... 이런 장면은 한국 아니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이것도 모자라 이들은 운전을 하는 기사한테까지 마이크를 건넨다. 한 손으로 운전하면서 다른 손으로 마이크를 잡고 멋들어지게 한 곡조 뽑지 못하면 관광 버스 운전할 자격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 놀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들 갔다. ( 이케하라 마모루,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 1997 )

'탈 음치' 작전
* 정세진 앵커 : 천년의 마지막 해라서 올 연말에는 어느 때보다 모임이 많으실 것입니다. 이 모임마다 빠지지 않는 노래방 문화 때문에 요즘 음치를 교정하느라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안현기 기자입니다.
* 안현기 기자 : 온 힘을 다해 소리를 질러 봅니다. 시원스레 소리가 나지 않으면 갖가지 방법이 동원됩니다. 노래 못한다, 음치다라는 말에 기죽어 지냈던 사람들이 좀더 나은 노래를 부르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부부 동반 모임이 많아질 연말을 앞둔 요즘, 특히 노래 못하는 주부들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 이계수 (주부) : 저희 남편한테 미안하죠, 같이 분위기를 못 맞춰 주니까......
* 인터뷰 : 흔들리는 찻잔 너머로~ 좋아요, 좋아, 조금만 정리되면 좋겠어요.
* 안현기 기자 : 매끄럽지는 않지만 한 번 불러본 노래, 작은 칭찬에도 큰 위안이 됩니다. 발성에서 호흡법까지 한 걸음씩, 목청껏 소리지르고 노래 부르며, 올 송년 모임에서는 반드시 음치라는 음영에서 탈출하리라 다짐해 봅니다. KBS 뉴스 안현기입니다.
( 99. 11. 21 일요일 저녁 9시 뉴스 )

“한국선 「음치학원」성업중”
한국에서 '가라오케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특수치료가 인기를 끌고 있다고 독일의 시사주간 포쿠스가 최신호에서 보도했다. 포쿠스는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음치가 탈모나 발기 부전같은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면서 이에 따라 음치 치료를 위한 학원이 호황을 맞고 있다고 밝혔다. 이 주간지는 "아시아에서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자리잡은 가라오케는 친구와 사업파트너간 유대를 강화하고 연애와 사업의 성공여부를 결정하기도 한다"면서 서울에서 '음치 클리닉'을 운영중인 이 병원(36)씨의 말을 인용, '노래를 못하면 성공도 못한다'고 전했다. 포쿠스는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시간당 수강료가 10만원인 이씨의 학원은 음치들로 붐비고 있다면서 수강생들은 "타잔처럼 괴성을 지르거나 부끄러움을 없애기 위해 양동이를 쓰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씨는 지금까지 최소한 1천명의 음치를 치료했다면서 앞으로 국내에 2개 학원을 추가로 개설하고 해외에도 진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일본의 음치들을 위해 열차에서 양동이를 쓰고 숲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가라오케 특별열차를 구상중이라고 덧붙였다.
( 조선일보, 1999년 1월 20일 )

[이벤트] 달리는 기차에서 음치 고친다
"음치들은 모두 모이세요."
`음치탈출 패키지 관광상품'이 나왔다.
`이병원 음치 클리닉'은 다음달 1일 철도청과 공동으로 기차 한 칸을 완전 개조, 달리는 기차를 공연장으로 만들어 음치 탈출과 지리산 단풍구경을 겸할 수 있는 `음치탈출 라이브 이벤트 열차'를 내놓았다.
이 행사는 지리산으로 가는 5시간 동안 달리는 기차 안에서 기차의 소음과 헤비 밴드의 강력한 음악에 맞춰 마음대로 고함을 지르게 한다.
지리산 도착 후엔 3시간의 자유시간 동안 음치 이벤트 (소리 찾기 퍼포먼스) 행사를 갖고, 명상 호흡법도 배운다. 참가비는 1인당 10만원. ( 조선일보, 98년 10월 20일 )

[음치] 양동이 쓰고 노래훈련 단기간에 고친다
`양동이 쓰고 음치 고친다.'
음정 박자 가사가 제멋대로인 `음치'를 고치는 클리닉이 여성들사이에 인기를 끌고 있다.
현재 미도파, 분당 블루힐, 천호동 현대 백화점, 대전 삼성 문화센터 등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음치 바이러스 퇴치 강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주인공은 싱어송 라이터 출신인 이병원씨(35). 그는 84년 가수로 데뷔, `신식구식' `밤이 내린 설악' `이별의 나무'를 불렀고, 88년 서울 올림픽 축하 음악 `세계 평화의 노래'를 작곡한 그는 가수 신중현의 `싱어롱'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얻은 노래 지도 실력을 바탕으로 최근 음치 클리닉 원장으로 변신했다. 그의 음치 퇴치 작전은 특이하다. 이른바 양동이 훈련법.
양동이를 쓴 사람은 자기 목소리를 다섯 배에서 열 배 이상 크게 들을 수 있어 목소리의 단점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일단 소리 싸움에서 이겨야 해요. 귀가 따가울 정도의 드럼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양동이를 쓰고 목청껏 노래를 부르다보면 목이 점점 트이게 됩니다. 그 다음에 노래를 선곡해서 일정한 호흡법에 따라 한소절씩 분해하는 작업에 들어갑니다."
그에 따르면 치료 기간은 정도에 따라 다르나 대개 `경증환자'는 10회 내외, 중증 환자는 6 개월에서 1년 정도 교육을 받으면 고쳐진다는 것.
그가 밝힌 음치 바이러스 20가지 가운데 특이한 것으로는 소위 멱따는 소리인 `흉부마비성 고음 불가증', 괴성인 `흉부마비성 음정 통제 불능증', `음악 공포성 청각 마비증', `대인 공포성 호흡 곤란증', `노래방 의존성 자아 상실증', `과민성 박자 불감증', `자모음 변이증' 등이 있다. ( 조선일보, 98. 3. 23 )

[생활] "나도 마이크 잡아보자"… 음치 클리닉 수입 짭짤
연말이 싫은 사람들, 으레 한 곡조 뽑아야 하는 망년 - 송년 자리가 무서운 사람들.
「음치」들의 수난기. 연말이 「음치 클리닉」에겐 성수기다.
서울 중랑구 묵동 상가 3층. 복도 끝 2평 남짓한 방에서 괴상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다. 한 사람이 드럼을 신나게 두드리며 “하나 둘 셋 넷 아, 하나 둘 셋 넷 아~”를 외친다. 그 옆에는 넥타이를 맨 중년 신사가 찜통을 머리에 뒤집어 쓴 채 찜통 밖으로 소리를 내 드럼소리를 이겨내려고 목청껏 “하나 둘 셋 넷 아~”를 따라 반복한다. 음치 치료 노래학원인 이 병원노래교실 (971-9916) 에서 치료 첫 단계인 발성 연습과 자기 목소리 듣기훈련을 하는 모습이다. 이 노래교실은 지난 달부터는 일요일에도 ‘환자’를 받아야 할 만큼 바쁘다.
“노래를 안 부르겠다고 해도 그냥 놓아둡니까. 못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즐기기라도 하듯이 끝까지 시키잖아요. 웃 사람이 계속 시키니 안 할 수도 없고요. 1차 중간에 슬그머니 빠지거나 핑계를 만들어 아예 회식에 빠지기도 합니다.” 두달째 이 음치클리닉을 다니는 건설회사 직원 전경 민씨(29)는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서 즐겁게 어울리고, 회사 회식 자리에서도 겉돌지 않으려고 맹 연습중”이라고 했다. 변호사 최민호씨(가명?42)도 “노래 부르는 자리에서 박수만 치는 역할에서 벗어나 보려고 왔다.”고 말했다. 이처럼 음치를 면하려고 찜통을 뒤집어 쓰는 고역도 마다 않는 사람들중엔 금융감독기관 모 국장부터 60세가 넘은 할머니도 있다.
서울 대치동 「둘다섯클리닉」(565-2620)도 「밤배」와 「긴 머리 소녀」를 불렀던 가수 오세복 씨(43)가 운영하는 음치클리닉이다. 오씨는 “스스로 음치라 믿는 사람들 대부분이 진짜 음치가 아니다”면서 “자신감이 없고, 노래를 부르면서 자기 목소리를 듣지 않기 때문일 뿐”이라고 위로한다. 오디션을 거쳐 음치 원인을 분석한 뒤 모음 발음, 시선 관리, 호흡점 찾기 훈련을 2~3 개월 거치면 대부분 노래 공포증을 떨쳐버리게 된다고 한다.
“스스로 음치라고 생각한다면 노래를 한 소절씩 끊어서 집중적으로 듣고 익힌 뒤, 노래를 부를 때 자기 목소리를 신경써서 듣는 훈련만 한다면 어렵잖게 음치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 조선일보, 97년 12월 17일 )








< 고구려 벽화의 한 장면 >

옛부터 한국인은 춤과 노래를 즐겼다.





단언하건대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춤과 음악을 즐기는 민족이다. 이렇게 열렬한 마음을 가진 민족이기에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 한국인이 앞으로 춤과 음악으로 세계사에 기여할 날이 올 것이다. 이런 문화적 풍토 속에서 세계적인 춤꾼과 세계적인 음악가가 나오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이미 우리들은 몇몇 한국출신의 세계적 음악가와 춤꾼들을 통해 그런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다. 한국인은 그런 자질을 충분히 갖춘 민족이다.
단순히 이 세계에 살아 남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삶을 살찌우고 아름답게 하는 춤과 음악으로 이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임무. 이것은 태초에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운명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춤과 노래가 역사의 굴레로서의 운명이었다면 앞으로는 전 세계 인류에 적극적으로 봉사하고 기여하는 적극적 운명을 떠 맡아야 할 것이다. 본질상 노래는 평화롭고 춤은 아름답기 때문이다. 부디 이 한반도와 이 온 세계에 평화롭고 아름다운 춤과 노래가 울려 퍼지기를 빌어본다.


(3) 조선이 망한 이유는?
100여년 전 서양인들은 조선인에게 민족적 우수성에 대해서는 매우 높은 점수를 주었다.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조선인은 잘 생겼고 신체가 강건하고 영민할 뿐만 아니라 외국어를 매우 잘 습득하는 민족이라고 파악하였다. 이러한 민족적 우수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서양인들은 그들의 저술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자연스럽게 제기한다.
‘이런 우수한 민족의 나라인 조선이 왜 그렇게 형편없이 나약하고 점점 망해가고 있는가? ’
그들은 조선 사회를 자기 나름의 시각으로 살펴본 후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데, 놀랍게도 그 답이 똑같다. 조선이 망해가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관리들의 부정부패’라는 것이다. 백성들에 대한 관리들의 수탈이 결국 조선인들의 활달한 생명력과 용맹성을 잃어버리게 한 중요한 이유라는 것이다. 영국 왕립 지리학회 회원으로 조선을 방문했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심지어 이 부패하고 백성을 수탈하는 관리를 ‘기생충’, ‘흡혈귀’로 표현하고 있다.


관리들은 짧은 재임기 동안 道, 郡 등의 안녕에 대하여 거의 무관심한 반면 그들은 억지로라도 세금을 쥐어짜기에만 열중한다. 누구나 그 지위에 오르면 광범위하고 신속한 착취를 통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려고 한다. ( Ernst Oppert, 「조선기행 Reisen nach Korea」)


관아 안에는 한국의 생명력을 빨아먹는 기생충들이 우글거렸다. 거기엔 티롤 모자를 쓰고 푸른색이 많은 조잡한 면직 제복을 입은 군인들과 포졸들, 문필가들, 부정한 관리들, 늘 일이 손에 달린 척 가장하는 전령들이 있었고, 많은 작은 방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서예 도구를 옆에 놓고 긴 장죽에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한국 관리들은 살아있는 민중의 피를 빠는 흡혈귀다.
( 이사벨라 버드 비숍,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

한국인은 섬세한 용모를 갖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빠져 있는데 그것은 힘이다. 더 씩씩한 인종과 비교해 보면 한국인은 기개가 없고 여성스럽다. 예전에는 용맹을 떨쳤지만 수세기에 걸친 집권층의 부패로 인하여 점차로 용맹성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 미국의 사회 소설가 잭 런던의 <조선 사람 엿보기> 중 )


이러한 그들의 진단은 대체로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구한말은 그야말로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관리들은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해 백성들을 수탈하기에 급급했다. 결국은 그것이 나라 전체가 망하는 길임을 자각하지 못하고서. 생산량이 늘어날수록 그만큼 비례해서 수탈량이 늘어나는 상황 속에서 백성들은 생산 의욕을 상실하게 되고, 점차 활기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 부분이 바로 100년 쯤 서양인들이 ‘조선인들은 매우 우수한 민족적 자질에 비해 대체로 게을러 보인다’고 한 중요한 이유가 된다. ‘게으름’을 민족성 정도로 치부해버리는 이들도 간혹 있으나 대부분은 관리들의 수탈로 인해 형성된 왜곡된 행동 특성으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관리들의 수탈이 제거되고, 행정적인 계기만 주어지면 한국인은 무서운 자발성을 발휘할 민족이고 ‘길이 행복하고 번영할’ 것을 확신하고 있다. ( 이 문제에 관심이 있는 분은 박성수, 『조선의 부정부패 그 멸망에 이른 역사』라는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 )


...... 그들은 게을러 보인다. 나는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인들이 자기 노동으로 획득한 재산이 전혀 보호되지 못하는 체제 아래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만일 어떤 사람이 ‘돈을 번’ 것으로 알려지거나, 심지어 사치품인 놋쇠 식기를 샀다고 알려지기만 해도, 근처의 탐욕스러운 관리나 그의 앞잡이로부터 주의를 받게 되거나, 부근의 양반으로부터 대부를 갚도록 독촉당하는 식이었다..... ( 이사벨라 버드 비숍 )


근사한 기후, 풍부하지만 혹독하지는 않은 강우량, 기름진 농토, 내란과 도적질이 일어나기 힘든 훌륭한 교육. 한국인은 길이 행복하고 번영할 민족임에 틀림없다. 협잡을 업으로 하는 관아의 심부름꾼과 그들의 횡포, 그들의 악행이 강력한 정부에 의해 줄어들고 소작료가 적정히 책정되고 수납된다면 반드시 그러할 것이다...... 여행자들은 한국인의 게으름에 많은 느낌을 가진다. 그러나 러시아령 만주에서의 한국인들의 에너지와 근면함 그리고 그들의 검소하고 유족하고 안락한 집의 가구들을 보고 난 후에 나는 그것이 기질의 문제로 오해되고 있는 것이 이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한국 사람들은 가난이 그들의 최고의 방어막이며, 그와 그의 가족에게 음식과 옷을 주는 것 이외에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은 탐욕스럽고 부정한 관리들에 의해 빼앗길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관리들의 수탈이 아주 견딜 수 없게 되고, 생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입마저도 빼앗겼을 때에만 한국의 농민들은 폭력을 통한 절망적인 방법에 의지하게 된다..... 한국인들은 어떤 행정적인 계기만 주어지면 무서운 자발성을 발휘하는 국민들이다. ( 이사벨라 버드 비숍 )

그런데 문제는 이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조선이 망하면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우리 의 발전을 가로막는 중요한 사회 문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거대하게 얽히고 설킨 부정의 고리, 이 고리를 끊고 공명정대한 사회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97년 외환 위기와 같은 국가 위기를 수도 없이 겪을 것이다. 21세기 우리 민족이 해결해야 할 과제 중 하나는 이 부정과 부패를 넘어 공명정대하고 깨끗하고 도덕적인 국가를 만드는 것이리라.


한국은 아직 ‘뇌물 공화국’








<한겨레2000. 3.22>



한국 정치인, 공무원들의 부패가 지난 해보다 올해 더 심각해졌다고 국제투명성기구(TI)가 26일 발표했다. TI가 반부패국민연대를 통해 이날 공개한 ‘99년 부패지수’에 따르면, 한국은 조사 대상국 99개국 가운데 부패 정도가 50위로 리투아니아, 자메이카와 같은 순위였다. 부패지수 50위는 요르단(41위), 짐바브웨(45위)보다 부패가 심한 것이다. 한국은 지난해 85개 조사국 가운데 43위였다. 한국 공직자들의 부패지수는 96년 5.02, 97년 4.29, 98년 4.2로 매년 악화됐고, 99년에는 3.8로 전년보다 부패가 심해진 것으로 나타났다. 부패지수는 ‘부패가 전혀 없는 상태’가 10점, ‘부패가 만연한 상태’가 0점이다. 점수가 높을수록 투명하고 깨끗한 사회로 평가된다. 덴마크 공무원들은 3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한국 기업들은 올해 처음으로 조사된 뇌물공여 지수(BPI)에서, 세계 주요 19개 수출국 가운데 중국 (홍콩 포함)에 이어 두 번째로 국제교역을 하면서 뇌물을 많이 준 것으로 평가된다. 국제 교역을 가장 투명하게 한 기업은 스웨덴 기업으로 8.3점을 기록했다. 국제 투명성 기구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반부패운동을 벌이는 국제 NGO로, 올해는 다섯 번째 부패지수를 작성, 공개했다. 93년에 설립돼 세계 77개국에 지부가 있으며, 세계 은행, OECD 등과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TI는 갤럽 등에 의뢰, 각국 기업인?경제 분석가?언론인 등을 상대로 세계 각국 공무원과 정치인의 뇌물 수수와 공금 착복 등 부패 정도를 조사해 부패지수를 산출한다. 부패지수는 각국의 부패 정도에 대한 상대적인 비교자료로 유용하게 사용된다.
( 조선일보 1999년 10월 27일자 )


한국기업 해외서도 뇌물 바치기 ‘못된 짓’
한국 기업들이 외국의 민간 사업 계약을 따내기 위해 해당국가 관리들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정도가 매우 높은 것으로 지적됐다. 20일 <로스엔젤레스 타임스>에 따르면 독일 베를린의 부패감시 민간기구인 국제 투명성 기구가 779명의 국제적 기업가들을 대상으로 해외에서의 뇌물 관행지수를 조사한 결과 한국이 3.4점으로 조사대상 19개국 가운데 18위를 차지했다. 이 조사는 10점을 뇌물 관행이 전혀 없는 것으로, 0점을 뇌물 관행이 아주 흔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스웨덴은 8.3점으로 뇌물이 가장 잘 통하지 않는 반면, 중국은 3.1로 뇌물수수가 가장 관행화돼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또 호주 8.1, 캐나다 8.1, 독일과 미국 6.2, 싱가포르 5.7, 스페인 5.3, 프랑스 5.2, 일본 5.1, 말레이시아 3.9, 이탈리아 3.7, 대만 3.5 등의 순이었다.
( 한겨레 신문 2000년 3월 22일 )



(4) 조선은 궁사의 나라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였던 볼테르가 1754년에 쓴 희곡 [중국의 고아들]에는 고려인이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구원을 상징하는 힘센 민족으로 나온다. 몽골의 칭기즈칸이 중국을 침략해와 황제의 아들이 포로가 되고 중국백성들이 위기에 빠졌을 때, 중국인들은 한결같이 ‘고려인이 곧 도와주러 올 것이다. 고려인만 오면 된다. 그때까지 버틸 수만 있다면......’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결국 중국은 몽골과 휴전하고 고려인은 극중에 등장하지 않고 성밖 까지 왔다는 소식만 남긴 채 희곡은 끝을 맺는다.
위의 예처럼 우리 민족은 매우 활달한 민족으로 외부에 알려져 왔다. 특히 옛부터 활을 잘 쏘는 민족이었다. 중국이 동쪽의 민족을 칭할 때 ‘東夷’라고 했다. 여기서 ‘夷는 ‘大+弓’, 즉 ‘큰 활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활 제작 기술도 매우 뛰어나 중국에 대한 수출품 중에 반드시 활이 있을 정도였다.
신라 구진천(仇珍川) 이야기는 우리 활 제작 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잘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실려 있다. 신라 문무왕때 구진천이라는 활을 아주 잘 만드는 기술자가 있었다. 그가 만든 활이 천걸음 바깥의 것을 맞춘다는 소문을 들은 당 고종은 사신을 보내어 구진천을 데려다가 그 활 만드는 법을 알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구진천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그 비법을 끝끝내 가르쳐주지 않았다.
활을 잘 만들고 잘 쏘았던 우리 민족의 이러한 전통은 계속 이어져, 조선시대에는 활쏘기가 일종의 스포츠이자 놀이로 생활화되었다. 즉 해마다 3월이 되면 여러 궁터에서 궁술회가 열렸는데 겨울 동안 활달한 놀이를 하지 못하고 방안에 갇혀 있던 청장년들이 봄이 되어 활쏘기로 심신을 단련하였던 것이다. 100여년 전 조선을 찾은 외국인들도 이런 활쏘기 대회에 강한 인상을 받았던 모양이다.


조선 사람들은 양반이나 서민이나 활쏘기를 좋아한다. 정부는 이 운동이 훌륭한 사수를 길러내는 하나의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장려하고 있다...... 조선인들은 유약하다거나 비겁하지 않다. 신체의 단련이며, 활쏘기, 사냥에 많은 취미를 가지고 있고, 피로 앞에 굴복하지 않는다.
( 프랑스 신부 달레(C.C. Dallet)의 <조선교회사 서설> 중 )


궁술은 아직도 곳곳에서 활발히 행해지는 놀이로 실제로 한국인들에게는 스포츠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얼마 전까지도 활은 전쟁에서 중요한 무기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활은 미국 활이나 영국 활에 비해 길이는 짧으나 더 무겁고 넓다. 소뿔을 정교하게 결합시킨 길고 넓은 조각으로 만들었는데, 미국 활이나 영국 활보다 훨씬 힘이 좋았다. 나는 그것을 당기기조차 힘들었는데 한국인들은 1야드의 나무대 끝에 쇠촉이 달린 화살을 연달아 과녁으로 날려 보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신기할 정도로 빠르고 힘차게 날아가 정확히 표적에 명중하곤 했다. 그들은 백 야드 거리에 과녁을 두고 서양의 권총과 시합을 해보겠냐고 제의하더라도 서슴없이 나설 것이다. 나는 이백 야드나 떨어진 과녁의 중앙에 연달아 명중시키는 것을 실제로 목격한 적이 있고, 심지어는 삼백 야드 거리의 과녁까지 명중시키는 경우를 본 적도 있다. ( 미국 외교관 윌리엄 샌즈 )


활쏘기는 이제 마을간의 민속 경연으로 생활화되었다. 보통 네 조로 나뉘어 돌아가며 활을 쏘는데, 과녁에 맞았을 때는 깃발로 명중 신호를 보내는 것이 보통이다. 때론 기생 넷이 각기 과녁 옆에 지켜서서 보고 있다가 화살이 과녁에 명중하면 쏜 사람의 이름을 대며 구성지게 창을 한다. 이러한 경합은 어두워서야 끝나는데, 이긴 사람은 참가자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여흥을 벌인다. 이러한 상황은 진 편에서 오히려 대접을 받게 되는 형국이지만, 대신 이긴 쪽은 다음 시합 때 먼저 활을 당기는 명예를 안게 된다. ( 스튜어트 컬린, 『조선의 놀이』중 )






활쏘기 시합 모습. 지는 사람이 술을 내게 마련이다.







독일에서 제작된 한국 소개 엽서. 세계 각국의 특색있는 문화를 소개하는 엽서에 ‘활쏘기’가 선정되었다.





전통은 쉽게 단절되지 않는다. 적어도 우리 민족에게 활쏘기만큼 오랜 전통을 가진 스포츠는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이 현재 활쏘기에서만큼은 세계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도 모
른다. 이게 전통 때문이라면 전통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선수들이 세계 양궁 선수권 대회나 올림픽 양궁 종목에서 금메달을 휩쓸 때, 우리는 그곳에서 만주 벌판을 활 쏘며 말 달리던 고구려 무사를 만나는 것이고, 구진천을 만나는 것이고, 활쏘기 대회를 즐겼던 조선시대 사람들의 소박한 삶과 만나는 것이다.


양궁 '한국은 무적'
양궁은 오래전부터 한국의 독무대였다. 70년대 거리별 기록만으로 진행된 경기에서 김진호는 세계선수권 7관왕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세계 각국이 한국을 견제하기 위해 경기 방식을 이렇게 저렇게 바꿔보았지만 한국의 독주를 막을 수 없었다. 한국은 지난해 캐나다 빅토리아세계선수권대회에서 세계선수권 사상 처음으로 4개 (남.여, 개인.단체) 의 금메달을 독식하는 쾌거를 이뤘고 이번 방콕아시안게임에서도 세계 최강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당초부터 양궁은 전관왕이 목표였지만 사실 코칭 스태프들의 걱정은 컸다. 누구나 금메달을 '당연시' 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한국의 궁사들은 이런 부담을 훨훨 털어버렸다. 여자에 이어 남자도 개인전에서 1, 2, 3위를 모두 차지해버렸다. 단체전에서도 여자는 단 한번도 마지막 3엔드까지 조마조마한 상황을 만들지 않고 여유있게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국제양궁연맹 (FITA) 이 한국을 견제하기 위해 바꾼 방식이 1대1 경기방식. 장거리인 70m에서만 쏘는데다 부담을 많이 주는 방식이라 한 발이라도 실수하면 탈락한다. 그러나 다른 선수들이 따라올 수 없는 강한 훈련과 마인드 컨트롤로 부담감을 털어버린 한국 선수들은 이번에 단 한번의 실수도 없이 완벽한 승리를 이끌어냈다. ( 중앙일보. 1998년 12월 18일 )



(5) 또 하나의 스포츠, 석전!






석전에서 한 소년이 돌을 던지는 장면. 프랑스인 큐빌리에 사진





우리 민족의 전통 민속 놀이 중에 석전(石戰)이라는 것이 있다. 이 놀이는 삼국시대부터 행하던 것으로, 농한기 때에 두 마을을 대표하는 마을 젊은이들이 이 편과 저 편에 마주 보고 대치하고 주먹크기 만한 돌을 서로 던지면서 겨루는 놀이이다. 그런데 이러한 놀이는 단순히 놀이가 아니라, 마을의 자기 방어 능력을 함양하기 위한 일종의 ‘군사훈련’이라는 성격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00 여 년 전 이 석전을 처음 본 서양인들은 이 놀이를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는데, 심하게는 야만적인 풍습으로까지 이해하기도 하였다.

남자들은 석전(石戰)을 매우 진지하게 하기 때문에 여기서 잠깐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이른 봄이 되면 서로 적수인 두 마을 사람들은 얼어붙은 들판에 모여 어느 편이 힘이 센지를 겨루는 시합을 한다. 머리에 새끼줄로 만든 헬멧을 쓰고 곤봉으로 무장한 선발대가 중립 지대를 가로 질러 상대편에게 덤벼들면 후방에서 방어를 하고 있던 사람들은 언덕을 달려 내려가 상대편 마을 사람들을 향해 돌팔매질을 한다. 이들은 돌팔매질을 능숙하게 하기 때문에 돌팔매질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실감나는 싸움 끝에는 몇몇의 사망자와 심한 부상자들이 많이 생긴다. 내가 조선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이러한 싸움이 벌어진 후, 전두골의 두개골판이 부숴져 뇌가 들여다 보이도록 심하게 다친 한 남자가 나를 찾아 왔다... 아마 군인들이 보면 이렇게 격렬하게 싸우는 주민들이 훌륭한 군사 훈련을 한다고 생각할 정도다. ( 의사, 외교관이었던 H. A. 알렌의 < 조선견문기 Things Korean > 중 )








『그래픽』1902년2월8일자에 실린 석전그림





돌싸움은 수백 명의 청년들이 참가하는 놀이로 매우 거칠고 위험하다. 언쟁이나 의견 충돌이 있는 마을끼리나 이웃끼리 문제를 이런 식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돌 던지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이 표적을 명중시켜 상대를 해치려고 돌을 겨냥 했다. 이 난폭한 놀이는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 영국인 선교사 와그너 )








갈등은 적절히 숨긴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석전은 서로 대립하는 갈등을 직접적이고 보다 분명하게 부딪혀 해소하여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자 했던 의지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그 후 식민지 시대에 일제는 이 놀이를 야만적일 뿐만 아니라 위험한 놀이라고 판단하였고, ‘돌던지기 같은 위험한 놀이를 하거나 시키는 자, 또는 길거리에서 공기총류를 갖고 놀거나 놀게 시키는 자는 구료 또는 과료에 처한다’는 경찰범 처벌 규칙(1912년 제정)에 따라 석전을 탄압하였다. 이런 일제의 금지 조치로 이 석전은 완전히 소멸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전통이 완전히 단절되는 법은 없다. 역시 전통은 놀라운 것이다. 주로 1980년대 대학생들은 이 석전을 형식상 완벽하게 계승하여 재현하였다. 그것도 도심 한복판에서. 눈물나는 재현...... 전통을 잇는다는 것은 그만큼 눈물과 고통이 따르는 법이다.
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초절정마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