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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문화강국 고구려 - 중국 성당(成唐) 문화를 낳은 고구려 문화

침미다래 2011. 4. 3. 17:08

 

고구려하면 패기넘치고 호전적인 나라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는 고구려에 대한 단편적인 편린이다. 고구려는 전투에 능한 호전적인 국가였지만, 동시에 뛰어난 문화를 지닌 문명대국이었다.

 

우리는 흔히 고대부터 우리민족은 항상 중국으로부터 문화를 전수받았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문화는 흐르는 물과 같아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 쉽다. 그렇지만 우리가 항상 중국으로부터 문화적 혜택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문화가 뛰어나면 역으로 그 문화가 중국으로 전파되어, 중국의 문화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단적인 예로 고구려가 바로 그 케이스다.

 

중국인들이 자기네 역사에서 제일 좋아하는 나라를 꼽는다면 주저없이 당을 꼽는다. 당나라는 사방으로 정복활동을 벌여 막북지역의 돌궐 철륵 거란을 굴복시키고 서방의 고창국, 토욕혼을 집어 삼켰을 뿐 아니라, 동방으로는 백제와 동북아시아의 강대국 고구려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좋아할만한 나라다.

 

당나라 290년의 역사를  문화사적으로 시기를 구분할 때 초당(), 성당(), 중당(), 만당()의 4가지로 구별하고 있다. 이 시기 중 당나라가 문화적으로 가장 번영을 구가한 시기는 성당시기로, 그 시기는 당 현종()의 개원() 원년(713)에서 숙종()의 상원() 2년(761)에 이르는 48년간이다.

 

그런데 당나라가 성당문화를 이룩하여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데에는 고구려 문화가 당으로 전파되었기에 가능했다. 고구려 문화가 없었다면 당은 성당문화를 이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고구려는 국초부터 문화강국은 아니었다. 초반에는 중국 한이나 낙랑, 대방세력으로부터 문화를 전수받아야 했다. 하지만 2세기 초 태조대왕 때 고구려는 정치적인 안정을 이룩하면서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후한 말부터 시작된 중국의 혼란으로 많은 지식인과 문화 예술인들이 고구려로 이주하였다. 더군다나 4세기 초 미천왕 때 낙랑, 대방을 멸하면서 그 곳의 고급인력들이 고구려로 유입되고, 4세기 말~5세기 초 광개토태왕이 사방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대제국을 건설함으로써 고구려는 기존의 문화와 정복지의 문화, 이전부터 줄기차게 고구려로 유입되어 온 중국의 문화를 융합하여 고구려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만들게 되었다.

 

황건적의 난으로부터 시작된 후한 말의 혼란은 위촉오의 삼국시대를 지나, 잠시 진나라 때 통일을 이룩하였으나 5호라 불리우는 유목민족들의 침입으로 중국은 5호16국, 남북조시대로 분열되고 말았다. 중국에서 전란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고구려로 몰려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중국의 수준높은 정치기술, 문화예술이 유입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고구려의 정치적인 안정 아래 경제적 생산력과 맞물러 수준높은 고구려 문화를 창출해냈다. 이로부터 300년 동안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훌륭한 문화를 꽃피웠다. 그런 고구려의 수준높은 문화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고분벽화다.

 

중국은 5호의 침입이래로 끊임없이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연히 수준높은 문화가 창출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이는 중국 고고학 발굴이 증명한다. 전란이 덜 미친 서북 변방인 돈황지역에서 불교사원이 조성된 것을 제외하면 아직까지 4세기 말~7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중국을 대표할만한 문화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1973년 중국 섬서성 삼원현에서 발굴된 당 고조이연의 사촌동생 회안왕 이수의 무덤에 그려진 벽화는 고구려의 것과 비교하면 그 수준이 매우 낮다.

 

그런데 이로부터 70~80년 후인 8세기 초, 중국 문화의 절정기인 성당시기가 도래하는데, 이 시기에 그려진 당나라 회화(고분벽화)는 당의 수준 높은 문화를 보여준다. 성당시기 왕릉에 그려진 회화는 '황가미술'의 집대성으로 당나라의 대표적인 예술이다. 이들 벽화에 그려진 예술적 표현방법은 당 초기의 것과 비교해볼 때 전에 보지 못하던 독특한 기법이다. 회화내용이 풍부할 뿐 아니라, 표현기술이 정교하고, 필법이 강건하며, 채색이 호화롭다. 마치 고구려의 고분벽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준다. 이 같은 당의 벽화가 완성된 시기가 고구려가 멸망한 지 불과 3~40년 이후의 일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고구려가 멸망하고 고구려의 문화가 당에 유입되어, 당의 문화를 업그레이드 해주었다는 의미라 유추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9월 21일 신라의 모든 군사들이 당의 대군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포위하고 공격해오므로 고구려왕은 먼저 천남산(연개소문 셋째아들)을 이적에게 보내 항복을 청했다. 이적은 보장왕과 왕자 복남, 덕남과 대신 등 20여 만명을 데리고 당나라로 돌아가자 각간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등이 따라갔다.

『삼국사기』권6 「신라본기」 문무왕 8년

 

여름 4월 고구려인들중에 이반자가 많이 생겨 이 중 38,200호(약 20만 명)를 칙명으로 강회(江淮) 이남과 당경(唐京) 이서의 황무지에 이주시켰다. 남아있는 빈약자들은 안동(安東)을 수호하도록 하였다.

『자치통감』권201「당기」 17 총장 2년

 

위 기사를 보면 알 듯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은 20만 명에 이르는 많은 수의 고구려인을 포로로 끌고 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위 기사에 주목하여 선문대 이형구 교수는 당에 포로로 끌려간 20만의 고구려인들 중에 화가, 음악가, 문인 등 예술가와 건축가, 영조장인(營造匠人), 공인(工人) 등 고급기술자들이 징발되었을 것이라 보고있다.

 

당나라가 성당문화를 이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수준높은 고구려 문화가 유입되었을 것이고, 당에 포로로 끌려간 고구려의 예술인들이 당의 문화를 끌어올리는데 이바지했을 것이다.

 

당나라의 고분벽화와 관련하여 당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은 장회태자 이현(654~684)의 무덤이다. 묘도의 동벽에 예빈도가 그려져 있는데 예빈도 그림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존재가 있다. 모자 좌우에 새의 깃털을 꽂은 모양의 쌍우 첨상 관모를 쓴 사람의 모자는 우리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늘 볼 수 있는 절풍(折風)이라 하는 고구려 특유의 모자와 같다. 홍령에 짧은 바지를 입고 단포를 두른 모습이 양직공도에 그려진 백제사신과 같아 고 김원룡 선생은 이 사람을 신라사신이라 보고 있다.

 

 

 

『위서』고구려조를 보면 고구려에서는 절풍에 새의 깃털을 꽂아 귀천을 구별했다고 하였다. 게다가 장회태자 묘에 보이는 인물의 복장이 평양 부근 용강에있는 5세기 말경 쌍영총 인물도와 비슷하다. 참고로 우즈베키스탄 아프라시압 벽화에 발견된 고구려인으로 보이는 두 명의 사절단은 머리에 절풍을 쓰고 있는데 예빈도에 그려진 인물과 비슷하다.

 

이현의 무덤 서벽에는 여러 그루의 소나무들이 열을 지어 그려져있는데, 이 그림이 평양 진파리 1호분 벽화에 그려진 소나무와 분위기가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이현의 무덤에 그려진 절풍을 쓴 사신은 신라사신이 아닌 고구려 사신이라 보는 견해도 있다.

 

당이 비록 고구려를 멸했지만, 그 땅을 온전히 차지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은 보장왕을 조선군왕에 봉하고 요동지역을 다스리게 했는데, 장회태자 이현의 묘에 그려진 사신은 바로 보장왕과 그 후손들에 의해 다스려진 요동지방의 소고구려국의 사신이라 보는 사람도 있다.

 

여튼 4~7세기 동북아시아 최고의 고구려 문화가 중국 중원지방으로 전파된 예가 바로 이 이현무덤의 벽화일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문화는 벽화 뿐이 아니었다. 고구려 음악과 고구려 춤 역시 당에 전파되어 큰 인기를 누렸다.

 

『구당서』등 중국문헌을 보면 고구려인의 가무를 고려악(高麗樂), 고려무(高麗舞)라 표현하고, 이를 귀족관료층이 즐겼다 언급하고 있다. 북방사 연구가인 서병국 교수님은 문헌에 귀족층이 즐겼다는 것은 먼저 서민들이 크게 즐겼음을 뜻한다고 한다. 이 시기 역사문헌이 서민들의 생활모습을 다루지 않고 귀족관료층의 모습을 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서 교수님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 

 

고구려 음악은 수나라 시대 궁정음악으로 인정받았을 정도로 수준높은 예술성을 지녔다. 당나라 때는 고구려 음악 25곡이 당나라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고, 당 역시 수나라와 마찬가지로 고구려 음악을 자신들의 궁정음악으로 채택하였다.

 

당나라 측천무후 때 어사대부로 양재사라는 인물이 있었다. 아부를 잘한 이 사람은 즉흥적으로 고구려춤을 잘 추었다고 한다. 『신당서』권109 양재사전을 보면 장역이란 사람의 형으로 사례소경(司禮小卿)의 벼슬을 갖고 있는 동휴가 양재사의 허가 아래 사례사에 잔치를 열고 공경들을 청했다. 모두 술이 거나해질 즈음 동휴가 "공(양재사)으 얼굴이 마치 고구려 사람 같습니다" 하니 양재사는 기뻐하며 주름 잡힌 고운 명주를 베어 건 위에 매어달고 자주색 두루마기를 뒤집어 걸치고 고구려 춤을 추었다. 그 춤동작은 가락에 잘 맞았다고 한다.

 

위 기사는 짤막하지만 눈여겨볼 만하다. 재상의 신분에 있는 양재사의 고구려춤이 박자에 잘 맞았다고 한 것은 그가 고구려춤을 확실하게 알고 추었다는 뜻이고, 동시에 잔치에 초대된 공경들이 고구려 춤의 율동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위 기록은 당시 당나라에서 고구려의 춤과 노래가 유행하고 있음을 전해준다. 

 

 

 

 

중국 사서는 고구려인들의 춤이 중국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아 매료시켰다 적고 있다. 당나라 때 시인 이백은 고구려 사람들의 춤 동작과 표정을 보고 느낀 감성을 찬미하였다. 이백이 태어난 해는 701년으로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여 년이 흘렀으나 고구려의 춤과 노래는 단절되지 않고 당나라에서 화려하게 꽃피웠다.

 

문화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발달된 문화는 타국으로 전파되기도 한다. 수백년동안 혼란스러웠던 중국에서 수준높은 문화가 배양되기는 어려웠다. 상대적으로 정치적으로 안정된 고구려에서는 외국인들을 받아들여 그들을 활용하여 자신들의 문화수준을 향상시켰다. 그리고 고구려는 끊임없이 외부로 영토를 확장하여 마침내 제국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와 외부의 문화를 하나로 융화시켜 고구려만의 문화를 만들어냈다.

 

문화강국 고구려가 만들어낸 문화는 고구려보다 수준이 떨어진 중원지역에 전파되어, 중국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고구려가 진정으로 강했던 원인, 고구려가 제국을 만들고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에는 고구려가 뛰어난 문화를 창출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란 생각이 든다

 

 

고구려를 수식하는 말은 많다. 대국, 제국, 강국 등등

하지만 문화강국, 문명대국이란 말이 고구려를 잘 수식해주는 말이 아닐까 란 생각이 든다.

 
 
 
 

참고문헌

서병국, 『고구려인의 삶과 정신, 혜안, 2000

이인철 외9인, 『대고구려역사 중국에는 없다』, 예문당, 2004

이형구,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김영사, 2004

 

 

 

 

 

 

 

 

 

 

 

 

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호루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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