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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께서 자주 말씀하셨어요.
한복치마가 가슴 윗부분부터 너무 콱 졸라매서 젊은 처녀도 가슴이 눌려서 힘들었다고.
가난한 하류층을 제외하고, 가슴을 드러낼 일이 거의 없으셨대요.
팔을 치켜들거나 하면 겨드랑이 부분(한복에서 잘 조면 약간 곡선으로 말려들어간 디자인임)
과 윗가슴부분이 보이기도 했지만 흔치 않은 이야기라고 하셨어요.
박완서의 그여자네집에서 가슴이 슬쩍 노출되는 부분은 이런 이야기가 아닐까 싶네요.
여자아이 한복 주목...
어린아이도 가슴을 동여맨 것을 확인할 수 있음.
오른쪽 한국미인도에서 짦은 저고리와 풍성한 말기치마, 팔을 들어올려서 곁마지(겨드랑이장식)
밑으로 살이 살짝 노출됨이 보여짐.
반회장 저고리
신윤복 그림
조선 말기로 갈수록 저고리가 짦아지고 가슴가리개가 등장.
실내용과 외출용 가슴가리개가 따로 있었다고 함. 노출을 피하기 위해 입혀진 속옷이 분명함.
(원통하게도 가슴가리개 사진 잃어버림-_-)
한복디자이너 이영희는 신윤복의 미인도에서 착안, 말기치마(짦아진 저고리를 보안하기 위해 치마허리부분이 두꺼워진 부분)
에 자수를 놓는 디자인을 하기도 함. 조선후기 기생한복이 현대한복에 미친 영향을 논문으로 할 생각도 하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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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벗은 여자들과 그네타는 여자, 오른쪽 이마에 짐을 진 여인 주목.
하류층 여인이 가슴 드러냄이 보여짐.
낮은 신분의 여인으로 추정. 가슴이 보이지 않음...
숙인 자세에서도 가슴이 보이지 않음.
기생의 가슴이 말기치마로 꽁꽁 싸여진 모습을 볼 수 있음.
장옷과 쓰개치마는 주로 양반계층에서 사용되었으나 넒리 허용했다고 함.
기생들도 장옷을 입어 외출할때 얼굴을 가리기도 했음.
한복은 옷깃이 목선에 딱 붙어서 고개를 숙일때 보이지 않아야 예법에 맞게 입는 것임...
두 여인의 저고리에 주목...
양반가문의 딸을 그린 그림.
양반가문 여인들은 저녁때 쓰개치마를 뒤집어쓴채 남자들이 다니지 않은 저녁에만 외출이 허락된 조선에서,
광범위하게 가슴노출이 있었다고는 납득하기 힘듭니다.
춘화에서도 벗으면 벗었지 저고리와 치마사이로 드러난 가슴이 흔치 않은데 사진은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_-
뉴라이트 교과서와 역사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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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을 드러낸 채 사진기 앞에 포즈를 취한 조선 여인의 사진 3장. 한 명은 가슴을 드러낸 채 물동이를 이고, 또 한 명은 밥을 먹고, 다른 한 명은 다리미질을 하고 있다.
이 사진 3장은 일제가 지난 1911년 경성사진관을 통해 펴낸 `조선풍속풍경사진첩'에 담겨있는 사진들이다. 가슴 노출 사진은 엽서로 제작돼 서구 유럽으로도 팔려나가면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이 덕택인지 20세기 초 서구유럽에 알려진 조선여인의 컨셉트는 바로 가슴 노출이었다.
아무리 일제 강점기라고 하지만, 유학의 나라 조선에서 어떻게 이런 사진이 촬영됐을까. 얼마 전 한 방송사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에서 그 비밀이 밝혀졌다. 이 방송에 따르면 3장의 사진 속 여인들은 모두 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 사진에 등장하는 각종 소품들 역시 동일한 것이었다. 조선의 어느 시골길에서 만난 아낙네를 촬영한 것으로만 알았던 이 사진들이, 실제로는 스튜디오에서 모델을 고용해 의도적으로 조작된 것이었다.
조선풍속풍경사진첩에 담긴 사진은 가슴을 노출한 조선여인의 사진만 있는 게 아니다. 헐벗고 굶주린 아이들, 게으른 남성들, 기생들, 총살당하는 의병들, 목에 칼을 쓰고 미소를 짖고 있는 죄수들 사진들도 있다. 하지만 이 사진들 모두가 가슴노출 사진과 같이 조작되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왜곡된 것들이다.
일제는 왜 이런 조작과 왜곡을 했던 것일까. 일제는 조선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상징 조작이 필요했다. "조선은 미개하고, 야만스럽고, 낙후된 나라다. 그래서 일본이란 강대국의 보호를 받아야한다"는 논리 전개를 위해 이미지 조작을 해야했던 것이다.
일제는 이후 고층 건물이 들어서고 철길이 놓인, 이른바 `개화된 조선'의 이미지도 대량으로 생산하며 또 다른 이미지를 조작한다. 일본의 식민 지배가 개화라는 선물을 안겨줬으니, 일본의 지배를 받은 조선은 복 받은 나라라는 또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최근에 뉴라이트 대안교과서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일제 지배를 미화하는 듯한 역사기술이 문제로 지적되면서 `한국판 후소샤 교과서'란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일제시대에 대해 뉴라이트 교과서는 "일제 강점기가 수탈의 시대이긴 했지만, 한국이 근대 국민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시기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나아가 5.16군사 쿠데타는 근대화의 출발점으로, 유신체제는 권위주의적 통치 시기이지만 고도성장과 사회변혁의 시기로도 묘사하고 있다. 이런 역사 기술에는 근대화와 산업화를 주도했던 세력이 바로 이 나라의 적통자(嫡統者)임을 강조하려는 역사 인식이 깔려있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뉴라이트의 이런 역사인식에서 왜 조선퐁속풍경사진첩의 잔영이 비치는 것일까. 근대화와 산업화의 주역이 이 나라의 적통자임을 주장하는 뉴라이트 교과서의 역사인식이, 무기력하고 미개했던 조선은 개화의 대상이며 이를 개화한 일본은 조선의 은인이라는 일제 식민지배 논리와 맞닿아있다는 생각은 너무 비약인가.
김응열기자 uy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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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가슴을 드러낸 조선여인의 사진엽서, 풍습인가? 연출인가?
일전에 어느 모임의 회의 때 외국인들에 의해 채록된 근대시기의 사진자료에 관한 평가를 하던 도중에, "젖가슴을 드러낸 조선여인의 사진"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누구는 이렇게 젖가슴을 드러내곤 하던 것이 원래 있던 우리의 풍습이며, 그러한 유습이 해방 이후 한동안까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봐도 그러하다는 의견을 보였고, 다른 누구는 예의범절이 엄격했던 우리의 사회관념에 비추어 젖가슴을 외부인에게 드러내고 다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인 동시에 이러한 종류의 젖가슴을 드러낸 사진은 필시 '사진촬영자'의 요구에 따른 의도적 연출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의견을 보였다.
각자 나름의 근거는 있는 주장이었던지라 어느 쪽의 의견이 반드시 맞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듯한데, 어쨌거나 꽤나 흥미있는 주제인 듯하여 이와 관련된 자료들을 여기에 모아보려고 한다. 어느 쪽의 의견이 맞는 것인지는 좀 더 자료를 축적한 뒤에 충분히 타당한 결론을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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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희, <조선에서 온 사진엽서> (민음사, 2005)
(206~209쪽)
사집엽서에서 재현된 조선 여성의 이미지 중 가장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소재가 바로 가슴을 옷 밖으로 내놓은 사진이다. 반라의 여성이미지는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시킨 것이자 식민지 여성에게서 미개성과 원시성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주로 '조선풍속'엽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가슴을 드러낸 여성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하나는 어린아이에게 젖을 주는, 모성애가 물씬 풍기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가사일을 하는 도중에 짧은 저고리가 위로 올라가 가슴이 보이는 장면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아프리카나 아랍의 여성들의 나체 사진과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19세기말부터 20세게 초에 걸쳐 하와이 여성들이 훌라를 추는 사진이 날개 돋친 듯 유럽과 미국으로 팔려나간 것 역시 이와 깊은 관련이 있으며, 프랑스에서 식민지 알제리 여성들의 나체 사진이 담긴 엽서가 유행했던 것도 똑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미개하고 야만적인' 풍속을 소개한다는 계몽주의적 발상은 실질적으로 남성의 성적 욕망에 부응할 수 있는 이미지로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의복 형태와 풍속으로 보아 여성의 가슴이 노출된 모습을 보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진엽서들을 보면 다분히 의도된 관음적 시선이 역력히 보인다. 그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 바로 스튜디오에서 촬영된 이미지다. 앞의 사진과 같이 조선의 여성은 모델로 고용되어 무대의 세트에 맞게 포즈를 취하고 준비된 소품과 함께 가슴을 '보여주고' 있다. 머리에 물건을 이고 있는 기이한 풍속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젖가슴을 사진의 정중앙에 배치한 것이다. 스튜디오가 아닌 길거리 현장에서 포착된 이미지들 역시 가슴이 다소 심하게 노출되어 있다. 짧은 저고리 아래로 얼핏 보이는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카메라를 응시하면서 가슴 전체를 보여주는 이미지는 다분히 촬영자의 요구에 따라 연출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조선인들의 원시성와 미개인을 표현하기 위해 스튜디오에서 연출하여 찍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말의 여인들이 외출도 잘 허용되지 않았던 유교도덕이 서슬퍼렇던 시절에 여인들이 이렇게
유방을 내놓고 다녔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가슴이 심하게 노출되고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
하는 걸로 봐서 이것도 연출된 사진임에 틀림없다...
젖가슴이 드러나는 패션이 어디있는가?
조선여인들은 얼굴을 가리기 위해 이렇게 장옷을 입고다녔다. 오른쪽 이화학당 졸업하는 여학생 사진에도 전연 젖가슴을 드러낼 분위기가 아니다.
외국인들이 시골로 다니며 평민이나 천민들의 여성들의 저고리 짧은 것에 주목을 했을 것이다. 조선여인들이 브래지어도 없이 짧은 저고리를 입고 활동을 하면 얼핏 젖무덤 근처가 드러나기도 했을 것이다. 외국인들은 그들의 관음적 시선과 또 조선인들을 원시적이고 미개하게 취급하는 그들의 계몽주의적 시각으로, 좀 과장되게 조선여인들의 유방이 드러나는 패션을 스튜디오에서 연출하여 세계의 상업시장에 내놓고 싶어 했을 것이다.
1883년경 조선을 방문했던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 역시 "저고리와 치마 사이에 틈이 벌어져 가슴이 약간 노출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런 일은 우물가에서 물을 길어 머리에 인 평민 계층에서나 볼 수 있는 우연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가사노동을 하거나 아이에게 젖을 줄 때나 보였던 여성의 가슴을 원시적이고 미개한 풍속으로 만들어 확대재생산한 것이 바로 사진엽서였던 것이다.
사진엽서는 당시 언제 어디서나 구입할 수 있는 대중적인 상품이었으며, 엽서 속에 드러난 조선여성의 가슴은 응시하는 자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에 훌륭했다. 곧 이러한 사진은 풍속을 찍은 것이라기 보다는 남성적이고 관음적인 시선으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한 것이었다.
▲ <사진엽서로 떠나는 근대기행> (부산근대역사관, 2003)에 수록된 '가슴을 드러낸 조선여인' 관련도판이다. 여기에는 "사진엽서에 보이는 여성들의 가슴은 대개 가사노동 중에 저고리가 위로 올라가거나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다소 작위적으로 가슴이 심하게 노출되거나 아예 저고리를 벗는 사진도 있다. 곧, 가슴을 드러낸 여성의 사진은 풍속이기 보다는 남성적 시선에 의해 여성이 성적 대상화된 관음적 시선이 농후한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라는 설명을 붙여두고 있다. (이 설명문은 위에 나온 <조선에서 온 사진엽서>의 저자에 의해 붙여진 것으로 알고 있다.) (*) 사진자료에 테두리 표시는 저작권 침해우려를 피하기 위한 장치임을 밝혀두는 바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사진 가운데 인위적인 연출의 결과물이 다수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곧 가슴을 드러낸 것이 (적어도 젖먹이가 있는 아낙네들에게는 자연스레 가슴을 드러내는 것을 용인하는) 우리 풍속의 일부분이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부인하지는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이러한 모습을 자연상태(즉 길거리)에서 보았다고 적어놓은 서양인들의 목격담들이 아래에서 보듯이 적지 않게 남아 있는 탓이다.
퍼시벌 로웰,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 (예담, 2001)
(259쪽)
여성의복으로는 매우 짧은 저고리에 풍성한 속곳과 속치마가 있다. 속치마는 서구 여성의 것과 비슷한 형태에 기다란 치마끈이 달려 있다. 이 끈은 인간의 신체 구조를 무시한 채, 치마를 될 수 있는 한 높이 올려 묶게 만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고리와 치마 말기 사이에는 종종 2내지 3인치 가량의 틈이 벌어져 유방이 약간 노출되는 경우도 생긴다. 한 가지 반드시 덧붙일 말은 이런 뜻하지 않은 일은 우물가에서 물을 길어 머리에 인 평민 계층에서나 볼 수 있는 우연일 뿐이다.
아손 그렙스트,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전 한국을 걷다> (책과함께, 2005)
(175쪽)
부산에서 서울까지 오는 도중에나 서울에 있는 동안에도, 밖에 나와 있는 여자들이 드물다는 사실이 이상에 생각되었다. 밖에 나와 있는 여자라 할지라도 대부분이 독특한 방식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얼굴을 가리지 않은 여자일 경우에는 젖가슴까지 드러내놓고 있었다. 얼굴을 가리지 않은 여자들은 대부분이 매무 박색인 까닭으로 처음에는 이 사실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끌라르 보티에, 이뽀리트 프랑뎅, <프랑스 외교관이 본 개화기 조선> (태학사, 2002)
(29쪽)
7. 여성과 복식(服飾)
중국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의식주의 불결함은 고질적이었다.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 아이들은, 그 자신들의 육체를 갉아먹는 기생충처럼 우글거리고 있었다. 여름이 되면 아이들은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았다. 여자들은 불룩한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축 처져 늘어진 젖가슴 아래로 그것을 졸라매었다.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이 처진 젖가슴을 아이를 많이 낳았다는 의미에서 영광스럽고 존경할 만한 표지가 된다.
바지 외에, 결혼한 여자들은 등에서 목까지 올라오고 가슴을 드러내는 적삼을 입고 있었다. 이 노출된 적삼 덕분에 어린애들은, 어머니가 하던 일을 멈추고 기분 전환삼아 젖을 물릴 때가 아니더라도 언제나 젖을 빨아 자신들의 주린 배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된다.
까를로 로제티, <꼬레아 꼬레아니> (숲과나무, 1996)
(112~113쪽)
세상의 어느 나라에도 한국에서처럼 엄격하게 여인들의 생활을 격리시키는 곳은 없다. 양반층의 여인이건 중류층의 여인이건 간에 집에서 나가는 일이 결코 없으며 할 수 없이 외출해야 할 때에는 반드시 완전히 차단된 가마를 이용해야 했다. 길에서 볼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여인들은 모두 사회적으로 최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며 이들 또한 대체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서울 여인들의 얼굴을 가리는 것은 머리에서부터 덮어씌운 초록색 비단외투로서 비록 소매 자락이 달려 있기는 하나 어떤 경우에도 그것을 입지는 않는다. 한편 도시 주변 농촌의 여인들은 이러한 외투 대신 흰 앞치마로 얼굴을 가리기도 한다. 이것이 한국 여인의 의복 중 가장 신기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독창적이며 어느 한국의 의상에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이 책에 실려 있는 사진들을 보면 된다. 한편 가슴을 드러내놓고 거리를 활보하는 여인들은 모두 예외 없이 최하층 계급인 칠반에 속하는 사람들인데, 지금은 영국과 미국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거리에서 이들을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A.H 새비지-랜도어,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집문당, 1999)
(66쪽)
여성의 복식
복장은 정말로 독특해서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 조선의 여인들은 남자의 것과 비슷한 솜 바지를 입으며 양말 또한 무명천으로 속을 누빈 것이다. 양말은 끈으로 바지의 발목 주위를 단단하게 동여매어 신는다. 그러나 당신은 조선의 귀부인들도 이와 같은 남성복장을 하고 거리를 나다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이러한 바지 위에 꽉 조이는 짧은 치마를 허리 위까지 받쳐입는다. 바지와 치마는 대체로 희고, 신분과 지위 그리고 그러한 의복을 입는 사람들의 사치 정도에 따라 명주나 무명으로 만들어진 것을 입는다. 보통 희거나 붉거나 푸른 작은 저고리로 대부부의 조선 여성의 의상은 완성된다. 그런데 의상의 한 가지 특징은 저고리가 너무 짧기 때문에 양쪽 가슴이 가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러시아나 심지어 캐나다보다 훨씬 더 추운 조선의 기후를 감안할 때, 기이하고 가장 비실용적인 옷차림이다.
(*) 여기에서 "양쪽 가슴이 가려지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가슴 부위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젖가슴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하겠다.
(정리 : 2006.6.21,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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