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c/잡동사니

[스크랩] 바람의 나라 ★ 해명태자 광팬이 전하는 역사이야기 (만화버전)

침미다래 2008. 9. 12. 19:35

자결을 앞둔 해명태자는 그를 따르는 괴유(실존인물, 원작에서는 해명의 부하였다가 무휼을 왕으로 모심)

에게 장차 왕이 될 동생 무휼을 얘기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린 무휼이 왕이 되고 5년 뒤 부여와 전쟁이 벌어지게 되는데 괴유가 대소왕의

목을 베어 고구려는 승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날 죽어서도 한나라 정벌의 웅대한 꿈을 잊지못해

망령으로 나타난 해명태자를 보며 무휼은 깊은 상념에 잠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무휼의 아들 호동왕자도 성장해 15-16세가 되던 어느날 동생 해색주(민중왕)와 통치방향을 논하며

가슴속에 담아둔 절절한 속내를 토해내는데...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마로(실존인물) - 원작에서는 괴유처럼 해명태자의 부하였다가 무휼을 왕으로 모시고 부여와의 전쟁에서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해명태자 자랑질을 하려고 원작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 아니에요. 물론 삼국사기에 기록된 해명태자도

기개와 용맹을 자랑한 그래서 이웃나라 황룡국도 반해 감히 죽이지 못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가 못다이룬 꿈, 훗날 대무신왕으로 동서남북 적국에 둘러쌓은 고구려를 제국으로 키우기 위해 여색을

멀리하고 평생을 국토확장에 전념했던 동생 무휼의 생애를 통해 조상님들의 발자취가 얼마나 뜨겁고

치열했는지를 느끼고

 

단군의 자손으로서 민족의 웅지가 짓밟히고 왜곡된 현실은 중국의 동북공정보다 청산하지 못한 친일파와

뉴라이트 떨거지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잊지않기 위해서에요.

 

머나먼 옛날 조상님들이 그랬듯이 우리의 전 생애를 바쳐 부평초로 떠도는 민족주의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도록 한다면 상상도 못 할 만큼 값진 댓가가 이 땅에 펼쳐질 것임을 알아야 하기 때문인거죠.

 

 

★━ 삼국사기 해명태자 편 ━★

 유리왕 27년(서기8년) 봄 정월에 왕태자 해명은 옛도읍에 있었는데, 힘이 세고 무용(武勇)을 좋아하였으므로, 황룡국의 

왕이 그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강한 활을 선물로 주었다. 해명은 그 사신 앞에서 활을 당겨 부러 뜨리며, “내가 힘이 세기 

때문이 아니라 활이 강하지 못한 탓이다.”라고 말하였다. 황룡국왕이 이 말을 듣고 부끄럽게 여겼다. 왕은 이것을 듣고 

성을 내며 황룡국왕에게, 

“해명이 불효하니 (그를) 죽여 줄 것을 청합니다.”라고 말하였다. 3월에 황룡국왕이 사신을 보내 태자와 만나기를 청하였

으므로, 태자가 가려고 하자 어떤 사람이 “지금 이웃 나라가 이유 없이 만나기를 청하니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라고 

간하였다. 태자는 “하늘이 나를 죽이려고 하지 않는데 황룡국왕인들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하고는 마침내 갔다. 

황룡국왕이 처음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그를 보고는 감히 해치지 못하고 예를 갖추어 보냈다. 

유리왕 28년(서기 9년) 봄 3월에 왕은 사람을 보내 해명에게 말하였다. 

"내가 천도(遷都)한 것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튼튼하게 하려는 것이다. 너는 나를 따르지 않고 힘센 것을 믿고 

이웃 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자식된 도리가 이럴 수 있느냐?" 

그리고 칼을 주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다. 태자가 곧 자살하려고 하자 어느 사람이 말리며 말하였다. 

"대왕의 맏아들이 이미 죽어 태자께서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하는데, 이제 (왕의) 사자가 한 번 온 것으로 자살한다면, 

그것이 속임수가 아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태자는 말하였다. 

"지난번 황룡국2) 왕이 강한 활을 보냈을 때, 나는 그것이 우리 나라를 가볍게 본 것이 아닌가 하여 활을 당겨 부러뜨려서 

보복한 것인데, 뜻밖에 부왕으로부터 책망을 들었다. 지금 부왕께서 나를 불효하다고 하여 칼을 주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니 아버지의 명령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여진(礪津)의 동쪽 벌판으로 가서 창을 땅에 꼽고 말을 타고 달려 찔려 죽었다. 그 때 나이가 21세였다. 태자의 

예로써 동쪽 들[東原]에 장사지내고 사당을 세우고 그 곳을 불러 창원(槍原)이라고 하였다. 

 

출처 :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네티즌 연대
글쓴이 : [쥔장]인간으로 원글보기
메모 :